
지중해의 패권 국가 로마의 문제점을 잔인하게 드러낸 형제가 있다. 바로 그라쿠스 형제 이다.
형의 이름은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 동생의 이름은 가이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 로 그라쿠스 형제는 로마가 사회적, 정치적 불안했던 시기에 로마의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형제의 아버지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는 로마 집정관을 지냈으며 어머니는 코르넬리아 아프리카나로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한니발을 물리친 로마의 유명한 그 장군!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딸이다.
두 형제에게는 꿈이 있었는데 그것은 흔들리는 로마를 바로 세우는 것이었다.
바로 원로원의 부패와 무능으로 인한 로마 사회의 문제를 개혁하려 했던 것이다.
티베리우스는 기원전 133년에 평민의 호민관으로, 가이우스는 기원전 123년과 122년에 호민관으로 선출되어 토지 개혁을 단행했으나 모두 살해당했다.
비록 꿈을 이루지 못했으나 그라쿠스 형제의 죽음은 로마 사회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기원전 2세기 로마의 정치 체제는 공화정으로 300명의 원로원이 최고 결정 기관이 되어 로마를 다스리고 있었다.
그러나 변화하지 못하는 체제는 도태 되기 마련이다.
공화정 로마는 포에니 전쟁을 겪으며 수세기 동안 급속도로 팽창해 왔으며 이러한 변화로 인해 많은 문제를 직면하게 된다.
그러나 부패한 로마 원로원은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힘이 없었다.
스스로 문제가 있다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라쿠스 형제가 살던 시대는 이러했던 것이다.
전쟁을 통해 획득한 토지는 권력자들에게 넘어가고 시민의 의무를 다해 전쟁에 참여한 농민들은 전쟁이 끝난 후 경작할 땅을 잃었다. 그리고 점차 가난에 빠지게 된다.
이것은 부익부 빈익빈의 결과를 낳는다.
이것이 왜 문제가 될까?
바로 나라의 근본이 시민이기 때문이다.
로마의 역사는 시민이 약해지면 나라가 흔들린다는 것을 알려준다.
가난해진 시민은 시민으로 서의 의무를 수행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니까 나라를 지키는 군인이 사라진 것이다.
중산층이 사라지고, 국방력이 약해진 나라는 어떻게 될까?
그라쿠스 형제는 그 결과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
기원전 133년에 맏형 티베리우스 그라쿠스가 평민 호민관으로 선출된다.
호민관으로서 그는 로마의 땅이 없는 가난한 시민들을 돕기 위해 토지 개혁안을 제안했다.
그의 가장 중요한 개혁 중 하나는 원로원이 부당하게 소유하고 거대한 땅을 가난한 사람에게 재분배하는 법이었다.
이 법은 부유한 지주들, 즉 원로원의 반대에 부딪히게 된다.
즉, 시민으로 이루어진 민회는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의 법안을 통과시켰으나 원로원은 반대했다.
티베리우스의 남동생인 가이우스 그라쿠스는 기원전 123년에 평민 호민관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형의 뒤를 이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곡물을 지급하는 등의 법안 제출하며 가난한 시민들을 구제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의 가장 중요한 개혁 중 하나는 시민들에게 상원 선거에 투표할 권리를 주는 법안이다.
그러나 역시 원로원은 이에 반대한다.
그라쿠스 형제는 형제는 로마 공화국을 개혁하려고 노력하였으나 결국 열매를 보지 못하고 암살당했다.
그러나 그라쿠스 형제의 삶은 로마 원로원의 무능함을 드러낸 첫 사건이된다.
한번 드러난 문제점은 불편한 가시처럼 지울 수 없는 것이다.
이 문제들은 어떤 형태로든 어떤 방식으로든 결국 결론을 맺게 된다.
부패한 기관은 되돌릴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이 부패했다는 것은 알고 고치려고 노력하는 경우이다.
그 후 로마의 공화정 시대는 저물고 제정 시대로 넘어가게 된다.
이것은 공공의 이익을 생각하는 현명하고 지혜로운 한 사람이 다수의 무능한 욕심쟁이보다 더 낫다는 어떤 철학자의 말의 반증일 수 있다.
그렇게 그라쿠스 형제는 짧은 시간동안 로마를 뒤흔들고 떠나게 된다.
지금도 그들은 로마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두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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