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39년 9월 1일 독일은 세계 2차대전 을 일으킨다.
30개국 이상에서 1억 명 이상의 병력이 직접적으로 전쟁에 참여하게 되고 참가국은 경제적, 산업적, 과학적 역량을 모두 전쟁 노력에 쏟아부었다.
세계 2차대전은 종전에는 민간과 군대의 구분이 모호해질 정도로 피말리는 전쟁이었다.
그 후 세계 2차대전은 1945년 9월 2일까지 이어지며 많은 병사들의 목숨을 앗아간다.
대략 5,000만에서 7,000만 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것으로 추정되며, 이들 중 상당수가 민간인이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의 원인은 대게 복합적이며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요인들이 복잡하게 얽히고 설켜있다.
세계 2차대전 발발에 기여한 여러 가지 요인은 다음과 같다.
1919년 독일과 연합국이 베르사유 조약은 맺은 평화 조약으로 세계 1차대전을 종식시켰다.
이 조약을 통해 연합국은 독일의 영토 상실, 미화 330억 달러에 달하는 전쟁 배상금, 라인란트의 비무장화 등을 포함한 가혹한 조건을 요구했다.
많은 독일인들은 조약이 불공평하고 독일을 모욕했다고 느꼈고 이러한 분노를 아돌프 히틀러와 나치당이 효과적으로 활용했다.
대공황은 1929년 미국 증시가 폭락했다. 글로벌 경제 위기로 이로 인해 전세계에 빈곤과 실업률이 올라가고 많은 국가에서 정치적 불안정이 발생했다.
독일도 역시 대공황의 영향을 피해가지 못했고 전쟁 후 힘든 상황 속에서 독일을 이전의 위대함으로 회복하겠다고 약속한 나치당이 인기를 얻게 된다.
1930년대 유럽에서는 파시즘과 군국주의 정부가 부상했는데 이들 정부의 특징은 공격적인 민족주의, 확장에 대한 열망, 목표 달성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았다.
파시스트 정부의 가장 두드러진 사례로 나치 독일과 일본 제국를 예로 들 수 있다.
전체주의는 단일 정당, 독재 그리고 개인의 자유가 결여된 정부 형태이다.
1930년대 유럽에서는 전체주의 정부가 등장하며 2차 세계대전 발발에 기여했다.
1939년 나치 독일의 폴란드 침공을 시작으로 세계 2차대전의 서막이 열린다.
나치 독일군은 전쟁 초기에 독일어로 Blitzkrieg(블리츠크리그)라 부르는 전술을 사용하는데 이 전술을 이용해 적의 허를 찌르고 재빠르게 점령하는 성공을 거둔다.
나치 독일은 전격전을 통해 1940년 노르웨이, 덴마크, 벨기에, 네덜란드, 프랑스 침공에도 성공하며 빠르고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전격전 이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군은 전차, 항공기, 공수부대를 이용하여 기동성을 최대한 추구한 전술 교리를 말한다.
이 전술은 기동성 있는 선두집단에 전력을 순간적으로 집중시켜 적의 방어선을 뚫은 후, 후방전력에 의해 이를 확고히 하는 과정을 거쳐 완성되었다.
전격전 공격은 적을 방심하고 사기를 저하시키도록 설계되었다. 1939년 폴란드 침공과 같은 기습 공격을 통해 달성되었습니다.
독일군에게 탱크는 Blitzkrieg에서 가장 중요한 무기 이다. 탱크 부대를 통해 적진을 돌파하고 보병대가 접근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드는 데 사용된다.
독일군은 육군에 대한 지원을 제공하기 위해 전투기를 사용했다.
지원이란 적의 위치 파악, 폭격, 정찰, 병력 및 보급품 수송 등을 말한다.
전격전에는 지휘관의 높은 수준의 유연성이 필요하다. 전장의 변화하는 상황에 맞춰 계획을 조정할 수 있어야 했다.
그렇게 진격전으로 승승장구한 나치 독일은 이듬해 1940년 4월 덴마크, 노르웨이를 점령하고 1940년 5월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그리고 프랑스를 점령하는데 성공한다.
1940년 6월 14일, 프랑스의 수도 파리가 독일군에게 함락되고 6월 22일 프랑스와 독일은 정전 협정을 맺는다.
히틀러는 이때 독일이 세계 1차대전 패전국으로서 항복 서명을 했던 그 열차를 파리로 가져와 이 열차의 식당 칸에서 프랑스 정부로 하여금 항복 문서에 서명을 하라고 명령하고 그 후 이 열차를 폭파시켜 세상에서 없애버린다.
히틀러는 그렇게 제1차 세계대전 패전 22년 후, 독일의 수치를 프랑스에게 되갚았다.
© 2022~2024 THE LIGHT. All Rights Reserved